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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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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의 외동딸로, 1892년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1913년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부인이 되었다.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혁명으로 왕족 지위를 상실했다. 전후에는 자서전을 출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1980년 하노버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격동의 시대를 산 왕족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증언을 남겼으며, 20세기 초 유럽 왕족의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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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세의 빅토리아 루이제 (1908년)
빅토리아 루이제 (1908년 경)
칭호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부인
전체 이름빅토리아 루이제 아델하이트 마틸데 샤를로테
(독일어)
출생일1892년 9월 13일
출생지독일 제국, 포츠담, 대리석 궁전
사망일1980년 12월 11일
사망지서독, 하노버
매장일1980년 12월 20일
매장지하노버, 베르크가르텐 영묘
배우자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1913년 5월 24일 결혼, 1953년 1월 30일 사망)
자녀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세자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프레데리카 여왕
크리스티안 오스카 왕자
벨프 하인리히 왕자
가문호엔촐레른 가문
아버지빌헬름 2세, 독일 황제
어머니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종교기독교 루터교
통치
공작 부인 배우자
통치 기간1913년 11월 1일 – 1918년 11월 8일

2. 초기 생애 및 교육

빅토리아 루이제는 1892년 9월 13일 포츠담의 대리석 궁전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의 일곱 번째 자녀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1] 황후는 "아들 여섯 명을 낳은 후, 신께서 우리에게 일곱 번째 아이, 작지만 매우 강한 작은 딸을 주셨습니다"라고 기록했다. 그녀는 황후의 생일인 10월 22일 포츠담의 새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1] 이름은 아버지의 증조모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시시"(Siss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녀는 아버지 빌헬름 2세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1][1] 영국인 가정교사 앤 토팜(Anne Topham)과 콘서트 피아니스트 산드라 드루커(Sandra Droucker) 등에게 교육을 받았다.[1] 1909년 10월 18일, 포츠담의 프리덴스 교회에서 견신례를 받았다.[1] 1911년 5월에는 부모와 함께 영국을 방문하여 버킹엄 궁전 앞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도 했다.[1]

2. 1. 가족 관계

빅토리아 루이제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번째 자녀이자 외동딸이다.[1] 어머니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는 "아들 여섯 명을 낳은 후, 신께서 우리에게 일곱 번째 아이, 작지만 매우 강한 작은 딸을 주셨습니다"라고 기록했다. 그녀에게는 빌헬름 황태자를 포함한 여섯 명의 오빠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 빅토리아는 아버지의 증조모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루이제는 역시 아버지의 증조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에게서 따왔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시시"(Sissy)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빅토리아 루이제는 아버지 빌헬름 2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의 맏오빠인 빌헬름 황태자에 따르면, 빅토리아 루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우리 중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바로 위 오빠인 요아힘 공자와는 자주 다투는 사이였다.

2. 2. 교육 및 성장

역사학자 저스틴 C. 보브크에 따르면, 빅토리아 루이제는 지적이었던 황후 프리데리케와 위엄 있고 품위 있었던 어머니 황후 아우구스타 빅토리아를 닮았지만, 아버지 빌헬름 2세처럼 오만하고 고집이 센 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주목받는 것을 즐겼으며[1] 아버지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1][1] 그녀의 오빠인 황태자 빌헬름은 빅토리아 루이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 유일한 자녀"였다고 회고했다.[1] 1902년, 그녀의 영국인 가정교사 앤 토팜(Anne Topham)은 처음 만났을 때 아홉 살이었던 공주가 친절하고 활기찼으며, 바로 위 오빠인 요아힘 공자와 끊임없이 다투었다고 기록했다.[1] 토팜은 또한 황제가 가정에서는 긴장을 풀었으며, 딸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빅토리아 루이제가 아버지의 생각이나 의견을 자주 인용했다고 덧붙였다.[1]

가족은 홈부르크 성에 거주했으며,[1] 빅토리아 루이제와 요아힘은 종종 인근 크론베르크 성에 사는 사촌들, 즉 마가렛 공주와 조피 공주의 자녀들을 방문했다.[1] 1905년부터 공주는 콘서트 피아니스트 산드라 드루커(Sandra Droucker)에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1909년 10월 18일, 그녀는 포츠담의 프리덴스 교회에서 견신례를 받았다.[1] 1911년 5월에는 부모님과 함께 왕실 요트 ''호엔촐레른''을 타고 영국을 방문하여 사촌인 조지 5세를 만났고, 버킹엄 궁전 앞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1]

3. 결혼과 가정

빅토리아 루이제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딸이었다.

1912년 하노버 왕가의 후계자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호엔촐레른 가문과 하노버 왕가 사이에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지속된 정치적 갈등이 있었으나, 양가의 타협을 통해 결혼이 성사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하노버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상속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13년 5월 24일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2] 이 결혼은 두 왕가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의미를 가졌다. 결혼식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유럽 왕족들이 대거 모인 마지막 주요 행사 중 하나였다. 결혼 후 부부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4]

빅토리아 루이제는 빌헬름 2세의 자녀 중 가장 오래 생존했으며, 1980년 하노버에서 사망했다.

3. 1. 정치적 배경

1913년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


빅토리아 루이제와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결혼은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프로이센 왕국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병합한 하노버 왕국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다. 이 병합으로 인해 하노버 왕가는 오스트리아 군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과 하노버 왕가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존재했다.

1912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형인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의 장례식에 참석해 준 빌헬름 2세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빅토리아 루이제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결혼 논의는 하노버 왕국의 계승 문제 때문에 몇 달간 지연되었다. 프로이센의 황태자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졌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하노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그의 아버지가 합법적인 상속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상속받기로 결정되었다. 이전까지 하노버 왕가는 하노버 왕국에 대한 권리 주장을 이유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 계승에서 제외되었었다. 이 타협안은 두 가문 간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는 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1913년 2월 11일 카를스루에에서 발표되었고, 결혼식은 같은 해 5월 24일 베를린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2] 이 결혼은 1866년 하노버 병합 이후 지속된 호엔촐레른 가문과 하노버 가문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더 타임스''는 이 결합을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유하며 오랜 반목 끝의 해피 엔딩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결혼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랑의 결합이라는 시각과 정치적 결합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역사가 에바 질로이는 프로이센 측이 갈등 종식을 위해 결혼을 추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빅토리아 루이제 자신은 편지에서 "사랑의 결합"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혼식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군주 모임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4개월 전 유럽 왕족들이 대거 참석한 마지막 주요 사교 행사이기도 했다. 빌헬름 2세는 외교적 제스처로 영국의 조지 5세 국왕(빅토리아 루이제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모두의 사촌)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차르(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사촌)를 포함한 거의 모든 친척을 초대했다. 또한 영국에 대한 선물로 투옥 중이던 영국 스파이 버트란드 스튜어트 대위와 버나드 프레데릭 트렌치 대위를 사면하고 석방했다.[3] 결혼 만찬에는 1,200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3. 2. 결혼식



1912년,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은 형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의 장례식에 빌헬름 2세 황제가 보낸 조문 사절단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했다가 빅토리아 루이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하노버 왕가는 프로이센 왕국이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이후 하노버 왕국을 합병하면서 오스트리아 군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 논의는 하노버 왕국의 계승권 문제와 얽혀 수개월간 지연되었다. 결국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는 대신, 그의 아버지가 정당한 상속자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을 상속받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1913년 2월 11일 카를스루에에서 약혼했으며, 성대한 결혼식은 1913년 5월 24일 베를린에서 열렸다.[2] 이 결혼은 1866년 하노버 합병 이후 지속되어 온 하노버 왕가와 호엔촐레른 왕가 간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더 타임스''는 이 결합을 두고, 비록 행복한 결말을 맞았지만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와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언론은 두 사람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목적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빅토리아 루이제 자신은 편지에서 "사랑의 결합"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결혼식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독일에서 열린 가장 큰 규모의 군주 모임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4개월 전 유럽 왕족들이 대규모로 모인 마지막 주요 사교 행사이기도 했다. 빌헬름 2세 황제는 외교적 제스처로 거의 모든 유럽 왕족 친척들을 초대했다. 여기에는 빌헬름 2세의 사촌이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외사촌이기도 한 영국의 조지 5세 국왕과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 황제도 포함되었다. 또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투옥 중이던 영국 스파이 두 명(버트란드 스튜어트 대위, 버나드 프레데릭 트렌치 대위)을 사면하고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3] 결혼 만찬에는 약 1,200명의 하객이 참석했으며, 성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는 외동딸을 떠나보내는 슬픔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3. 3. 자녀

브라운슈바이크 궁전으로 이사한 빅토리아 루이제 부부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14년 장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를 낳으며 가정을 이루었다. 이후 네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공자 (1915–2006), 프리데리케 공주 (1917–1981), 크리스티안 오스카 공자 (1919–1981), 벨프 하인리히 공자 (1923–1997).[4] 딸 프리데리케는 훗날 파블로스 1세와 결혼하여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빅토리아 루이제는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증조모가 된다.

이름[18]출생사망비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1914년 3월 18일1987년 12월 9일 (향년 73세)1951년 첫 번째 결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오르트루드 공주와 결혼, 자녀를 낳음.
1981년 두 번째 결혼, 졸름스-라우바흐의 모니카 백작 부인과 결혼; 자녀 없음.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1915년 3월 25일2006년 1월 8일 (향년 90세)1946년 결혼,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 공주와 결혼; 자녀를 낳음.
프리데리케 공주
(헬레네의 프리데리케 여왕)
1917년 4월 18일1981년 2월 6일 (향년 63세)1938년 결혼, 그리스의 파울로스와 결혼; 자녀를 낳음.
크리스티안 오스카 왕자1919년 9월 1일1981년 12월 10일 (향년 62세)1963년 결혼, 미레유 뒤트리(1946년 1월 10일 출생); 1976년 이혼; 자녀를 낳음.
벨프 하인리히 왕자1923년 3월 11일1997년 7월 12일 (향년 74세)1960년 결혼, 이젠부르크-뷔딩겐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 자녀 없음.


4.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빅토리아 루이제, 딸 프레데리카, 손녀 스페인 소피아 왕비, 1939년.


독일 혁명 이후 왕족 지위를 잃고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빅토리아 루이제와 가족은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이후 30년간 하노버 왕가의 수장으로 남았으며, 가족과 함께 주로 독일의 블랑켄부르크 성과 오스트리아의 컴벌랜드 성 등 여러 영지에서 지냈다. 하노버 근처의 마리엔부르크 성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는 그곳에서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나치당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빅토리아 루이제의 가족 일부도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인 전 황태자 빌헬름과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등은 초기에 나치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공식적으로 당원은 아니었으나, 나치당에 자금을 지원하고 일부 지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영국 왕족의 지위를 가졌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빅토리아 루이제는 영국과 독일 간의 ''화해''를 원했다. 1930년대 중반,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배경을 이용하여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부부에게 접근했다. 히틀러는 그들의 딸 프레데리카 공주와 당시 웨일스 공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부부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는 이유(프레데리카 약 18세, 웨일스 공 22세 이상 연상)로 이를 거절했다. 이후 웨일스 공은 1936년 에드워드 8세로 잠시 즉위했다가 퇴위하여 윈저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내 월리스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컴벌랜드 성을 방문하기도 했다.[5] 프레데리카 공주는 1938년 사촌이자 훗날 그리스 국왕이 되는 파블로스 1세와 결혼했다.[6]

5. 나치 시대와 제2차 세계 대전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 왕가의 수장이 된 후, 빅토리아 루이제와 가족은 주로 독일의 블랑켄부르크 성과 오스트리아의 컴벌랜드 성 등 여러 영지에서 지냈다. 하노버 근처의 마리엔부르크 성도 소유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까지는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

나치 시대 동안 일부 가족 구성원들은 나치당과 연관을 맺기도 했으며,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부부의 입장을 이용한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적 움직임도 있었다.[5][6]

5. 1. 제2차 세계 대전 중



빅토리아 루이제의 형제 중 일부, 예를 들어 전 황태자 빌헬름과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등은 초기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공식적으로 당원은 아니었지만, 나치에 자금을 지원하고 일부 지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빅토리아 루이제는 영국과 독일 간의 관계 개선을 원했다. 1930년대 중반,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부부에게 딸 프레데리카 공주와 당시 웨일스 공의 결혼을 주선하도록 요청했다. 이는 표면적으로 영국과의 동맹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부는 프레데리카 공주(당시 약 18세)와 웨일스 공(당시 22세 이상 연상)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이 제안을 거절했다. 1936년 에드워드는 짧은 재위 후 윈저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내 월리스 심슨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컴벌랜드 성에서 부부를 방문하기도 했다.[5] 프레데리카 공주는 대신 1938년에 사촌이자 훗날 그리스 국왕이 되는 파블로스와 결혼했다.[6]

1941년 5월, 아버지 빌헬름 2세가 장 폐색으로 병을 앓자 빅토리아 루이제는 여러 오빠들과 함께 아버지가 머물던 네덜란드 도른으로 문병을 갔다. 빌헬름 2세는 잠시 호전되어 자녀들이 떠날 수 있었으나, 곧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다. 빅토리아 루이제는 조카 루이 페르디난트와 계모 헤르미네와 함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고, 1941년 6월 4일 빌헬름 2세가 폐색전증으로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다.

1945년 4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빅토리아 루이제는 남편과 함께 블랑켄부르크 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블랑켄부르크 지역이 적군에게 넘겨져 동독의 일부가 되기 며칠 전, 영국 조지 6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영국 육군이 트럭을 동원하여 부부와 모든 가구를 영국 점령 지역에 위치한 마리엔부르크 성으로 안전하게 이주시켰다. 이로써 부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방 점령 지역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6. 전후 활동 및 말년

1945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빅토리아 루이제는 남편과 함께 블랑켄부르크 성에 살고 있었다. 블랑켄부르크가 동독의 일부로 적군에게 넘겨지기 며칠 전, 조지 6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영국 육군 트럭으로 모든 가구와 함께 당시 영국 점령 지역에 위치한 마리엔부르크 성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자서전에 서명하는 공작부인 (1970)


전후 빅토리아 루이제는 니더작센 주에서 열리는 여러 공개 행사에 참석했으며, 궁궐 복원 사업을 지원하고 사교계 모임, 사냥, 승마 쇼 등에 참여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휴양지 설립을 돕는 등 자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953년 1월 30일 마리엔부르크 성에서 사망했다. 이후 1954년, 장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마리엔부르크 성을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인근의 칼렌베르크 영지로 이주하면서 빅토리아 루이제와 갈등을 겪었다. 아들이 다른 거처를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중적 인기와 활동을 둘러싼 모자간의 경쟁심 또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브라운슈바이크로 이주하여, 부유한 사업가들과 '브라운슈바이거 친구 모임'(Braunschweiger Freundeskreisde)이라는 지지자 그룹이 마련해준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1965년에는 자서전 ''황제의 딸로서의 삶''(Leben als Tochter des Kaisersde)을 출판했으며, 이후 어머니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와 시누이인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전기를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만, 그녀의 출판업자인 레온하르트 슐뤼터가 실제 대필자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7]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황제의 딸로서의 삶'' (Leben als Tochter des Kaisersde)
  • ''시간의 흐름 속에서'' (Im Strom der Zeitde)
  • ''제국 시대의 이미지'' (Bilder der Kaiserzeitde)
  • ''100년 전'' (Vor 100 Jahrende)
  • ''황태자비'' (Die Kronprinzessinde)
  • ''독일의 마지막 황후'' (Deutschlands letzte Kaiserinde)


빅토리아 루이제는 1980년 하노버에서 사망했으며, 헤렌하우젠 정원의 왕실 묘소에 있는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이 묘소에는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과 그의 아내[8],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곳에 재매장된 영국 국왕 조지 1세도 함께 묻혀 있다.

하노버의 베르크가르텐 묘소 앞에 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빅토리아 루이즈의 묘

7. 유산 및 평가

빅토리아 루이제는 자신의 삶과 시대를 다룬 여러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황제의 딸로서의 삶'' (Ein Leben als Tochter des Kaisersde)
  • ''시간의 흐름 속에서'' (Im Strom der Zeitde)
  • ''제국 시대의 이미지'' (Bilder der Kaiserzeitde)
  • ''100년 전'' (Vor 100 Jahrende)
  • ''황태자비'' (Die Kronprinzessinde)
  • ''독일의 마지막 황후'' (Deutschlands letzte Kaiserinde)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시인 데이비드 존스는 자신의 산문시 ''괄호 안에서''에서 서부 전선 병사들이 부른 노래의 한 구절, "나는 빅 빌리(빌헬름 2세)의 사랑스러운 딸을 원한다"를 기록했다. 존스는 이 구절이 "영국 원정군이 프랑스로 간 목적은 황제의 딸의 매력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언급했다.[9]

또한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여러 척의 선박과 비행선이 건조되었다.

이름종류진수비고
SMS 빅토리아 루이제방호순양함1897년 3월 29일1923년 폐기[10]
프린체신 빅토리아 루이제여객선1900년 6월 29일1906년 12월 16일 자메이카 해안에서 난파[11]
빅토리아 루이제여객선1900년 1월 10일 (도이칠란트로 진수)1910년 개조 및 개명, 1921년 한자로 재개명, 1925년 폐기
LZ 11 "빅토리아 루이제"체펠린 비행선독일 항공 수송 주식회사(DELAG) 소속[12]


8. 훈장

참조

[1] 웹사이트 Victoria Luise Prinzessin von Preussen https://web.archive.[...] Haus Hohenzollern 2012-12-11
[2] 웹사이트 Royal Wedding In Berlin 1913 https://www.britishp[...] 2021-09-27
[3] 간행물
[4] 웹사이트 At the Court at Buckingham Palace, the 28th day of March, 1919. http://www.london-ga[...]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1919-03-28
[5] 문서 Autobiography Life as Daughter of the Emperor
[6] 서적 Almanach de Gotha Justus Perthes (publishing company)
[7] 문서 Die Bücher der Herzogin Victoria Luise und ihr Verleger Leonhard Schlüter
[8] 웹사이트 Herzogin Viktoria Luise – Munzinger Biographie https://www.munzinge[...] 2022-10-13
[9] 문서 In Parenthesis
[10] 서적 German Warships 1815–1945 Naval Institute Press
[11] 서적 Giants of the Seas: The Ships that Transformed Modern Cruising https://books.google[...] Seaforth Publishing 2013-10-01
[12] 웹사이트 DELAG: The World's First Airline https://www.airships[...] 2009-03-11
[13] 문서 Handbuch über den Königlich Preußischen Hof und Staat fur das Jahr 1908
[14] 웹사이트 Princess-victoria-luise http://www.meaus.com[...]
[15] 서적 Guía Oficial de España 1930
[16]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Preußen
[17]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Druck und Verlag der K.K. Hof- und Staatsdruckerei 1918
[18] 문서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19] 서적 L'Allemagne Dynastique, Tome V – Hohenzollern-Waldeck Laballery
[20] 서적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Band IV. C.A. Starke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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